
이야기는 인물로부터 시작되고, 인물은 직업을 통해 그 세계 안에서 살아 숨 쉰다. 문학 창작자에게 직업은 단순한 설정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인물의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 사회적 위치, 갈등의 원인과 극복의 동기를 형성하는 중심 축이다. 특히 전통 사회를 배경으로 한 서사에서 전통 직업은 이야기의 신뢰도를 높이고, 풍부한 디테일을 가능하게 하며, 때로는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의 경계를 넘나드는 통로가 된다. 그러나 현대인의 시각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전통 직업은 그 자체로 진입장벽이 되기도 한다. 본 글은 창작자들이 전통 직업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직업군별 특성과 설정 팁을 정리하고, 각 직업이 서사에서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용적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관료·지식인 계층의 직업: 권위, 갈등, 이상주의의 매개
조선시대와 그 이전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상층 직업군은 관리, 선비, 서리, 역관, 율관, 의관 등이다. 이들은 대체로 국가 시스템 안에 속하며, 시험이나 가문, 후천적 학습을 통해 진입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관리(관직)는 당파 간 권력 다툼, 중앙과 지방 간 행정 갈등, 청렴과 부패의 대조, 개인 윤리와 국가 명령 사이의 딜레마 등 다층적 갈등을 설정할 수 있는 직업이다. 선비는 유학적 가치관을 기반으로 하여 이상주의적 인물 구성을 가능하게 하며, 현실 사회의 부조리와의 충돌을 통해 극적인 서사를 도출할 수 있다. 서리(문서 업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청 직원)는 겉보기에는 비주류이지만, 문서 조작, 정보 유통, 뇌물 수수 등 은밀한 권력 작용의 연결고리로 설정 가능하다. 역관은 외국어 능력을 바탕으로 외교, 통상, 첩보 활동까지 확대될 수 있으며, 국경과 문화의 경계에 선 인물로 입체적인 서사가 가능하다. 의관은 단순한 의료 전문가가 아니라 궁중, 양반가, 혹은 민간의 질병과 권력, 계급 갈등을 연결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모든 지식인 계층은 책과 말, 관념으로 움직이는 사회적 존재로 설정되기 때문에, 창작자 입장에서 사건보다는 내적 동기와 논리적 갈등을 중심으로 서사를 구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직업군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고증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으며, 문헌, 일기, 관찬 기록 등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디테일한 설정이 가능하다. 또한, 상징성과 대사 중심의 묘사에 유리하므로, 희곡, 시나리오, 장편소설 모두에서 활용 범위가 넓다. 캐릭터의 세계관, 가치관, 시대적 갈등을 한 몸에 압축시킬 수 있는 직업군이라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중심 인물에 배치하기 적합하다.
기술자·장인 계층의 직업: 손의 기억, 지역성과 생존의 드라마
전통 사회에서 기술직은 실질적으로 사회를 유지한 직업군이지만, 기록에서는 상대적으로 소외된 경향이 있다. 그러나 창작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 빈 공간이 상상력의 영역을 넓혀준다. 대장장이, 목수, 화원, 제지공, 활자장, 도공, 침선장, 악공, 염색장 등은 각자 도구와 공간, 공동체 속 역할을 기반으로 강한 ‘현장감’을 제공하는 직업군이다. 이들은 물성을 다루는 직업이므로, 묘사에 있어 촉각적·시각적 디테일을 풍부하게 설정할 수 있으며, 특정 기술을 둘러싼 전수, 경쟁, 배신, 몰락, 부활의 서사 구조도 자연스럽게 녹여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도공은 흙과 불, 형태와 균열 사이에서 창작과 파괴의 양면을 상징할 수 있는 캐릭터로 설정할 수 있다. 대장장이는 도구를 만들지만 동시에 무기를 다루는 이중적 성격을 가질 수 있으며, 공동체의 명맥을 잇는 존재로 설정될 수 있다. 제지공과 활자장은 지식 유통의 물리적 기반을 담당하는 인물로, 책이라는 상징을 통해 정보를 통제하거나 진실을 은폐하는 도구로도 활용 가능하다. 악공은 궁중이나 제례, 민속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예술가로서, 예술과 권력, 개인 감정 사이의 충돌을 풀어낼 수 있다. 이 직업군은 지역성과 계절성, 자연 환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특정 공간과 세계관 구축에 매우 유리하다. 예컨대 ‘남도의 염색장’, ‘산간 지역의 제지공’, ‘해안 마을의 목선 장인’ 등은 로컬성과 역사성을 결합한 설정이 가능하며, 그 공간 안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지식과 생존 전략을 서사화하는 데 효과적이다. 또한 이 계층은 세습과 전수, 장인의 고독, 기술의 쇠퇴와 부흥, 시대의 변화를 가장 먼저 체감하는 민감한 존재로, 역사의 질곡 속에서 가장 극적인 개인사를 구성할 수 있는 직업군이다.
하층·서민 직업군: 생존, 연대, 시대 정서의 거울
문학에서 현실성을 확보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 중 하나는 하층 노동과 일상을 재현하는 것이다. 사라진 전통 직업들 중 엿장수, 우산장수, 나막신장수, 신문팔이, 물지게꾼, 삯바느질, 아이스께끼 장수, 행상, 장터 상인 등은 극도의 생존 환경 속에서 인간적인 감정, 공동체와의 연결, 시대적 정서를 드러내는 데 탁월한 장치가 된다. 이 직업들은 일과 삶의 경계가 거의 없으며, 생존 그 자체가 서사의 동력이 되므로, 단순한 배경 인물로 처리하기보다는 하나의 주체로 서사를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신문팔이는 시대의 정보를 전하면서도, 그 자체로 어린 소년 가장의 이야기, 거리의 변화, 계층 이동의 열망 등을 담을 수 있다. 행상은 지역 간의 물자 유통과 정보 교류의 연결고리이며, 여러 공간을 이동하는 특성상 지역의 문화, 계절의 변화, 사람들의 감정을 전하는 서사 장치로 활용될 수 있다. 삯바느질은 여성의 생계형 노동이자, 여성 공동체 내 감정 교류와 지원의 상징으로 기능할 수 있다. 엿장수는 단순히 단 것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물물교환과 이야기를 전하는 문화적 중재자로 서사를 끌고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직업군은 특정 시대의 정서와 민중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창작자에게 있어 이 직업들은 시대에 따라 유연하게 변형이 가능하며, 계층 간 갈등, 지역 차이, 가족 구조, 성별 역할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와 연결될 수 있다. 또한 대사보다 행동과 몸짓, 반복된 리듬과 풍경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기에 적합하므로, 영화적 서사나 회화적 장면 구성이 중요한 창작에서 특히 유용하다. 현실에 기반하면서도 시대와 인간을 통찰하는 깊이를 가질 수 있는 이 직업군은, 서사의 감정선을 촘촘히 짜는 데 최적화된 자원이다. 문학 창작자는 허구를 다루지만, 그 허구는 언제나 현실을 비추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전통 직업은 사라졌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체온과 호흡, 고단한 일상과 희망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창작자는 이 직업들을 단순히 장식적 배경으로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대의 증언자로서, 사회 구조의 반영체로서, 인물 내면의 거울로서 새롭게 구성해내야 한다. 전통 직업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 속에서도 충분히 살아 숨 쉴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서사적 원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