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대 이후 우리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급격한 산업 구조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특히 디지털화, 자동화, 인터넷 보급은 사람의 손이 필요한 직무를 빠르게 대체했고, 많은 전통적인 직업들이 점차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직업들 중 일부는 아직 기억에 남아 있지만, 일부는 완전히 잊히고 있는 중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90년대 이후 우리 주변에서 사라진 직업들을 중심으로, 그 흔적과 문화적 의미를 되새겨보려 합니다. 이 직업들은 단순히 ‘없어진 일’이 아닌,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삶과 노동의 기록입니다.
비디오 대여점 직원 – 문화 소비 방식의 변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주말이면 동네 비디오 가게를 찾는 것이 일상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비디오테이프가 진열된 가게에서, 이용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고르고, 직원에게 대여 및 반납을 맡기곤 했습니다. 이때 비디오 대여점 직원은 단순히 테이프를 관리하는 사람을 넘어서, 고객과 영화 이야기를 나누고, 추천작을 소개해주는 문화 큐레이터 같은 존재였습니다. 인기 영화가 출시되는 날이면 줄을 서거나 예약을 걸어두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매장의 분위기나 직원의 친절도는 단골 유치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DVD, 블루레이 등으로 영상 매체가 변화하면서 기존의 VHS 기반 비디오 대여점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2010년대 들어 넷플릭스, 왓챠, 디즈니+ 등의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가 보급되면서 비디오 대여점의 존재 이유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대형 프랜차이즈였던 ‘비디오나라’, ‘씨네통’ 같은 브랜드조차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지금은 일부 레트로 콘셉트의 전시 공간이나 유튜브 콘텐츠에서만 그 흔적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비디오 대여점 직원이라는 직업은 단지 업무 담당자 이상의 역할이었고, 당시 사람들에게 영화라는 문화 콘텐츠를 매개하는 중요한 존재였다는 점에서, 그 사라짐은 하나의 세대적 전환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신문지국 배달원 – 아침 풍경의 주인공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이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확인하는 것으로 바뀌기 전까지, 한국 사회의 아침은 신문 배달로 시작되었습니다. 신문지국 배달원은 이른 새벽 어두운 골목을 돌며 수십, 수백 부의 신문을 정확히 각 가정 문 앞에 놓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대부분의 배달원은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이용해 배달했으며, 1년 내내 기상 조건과 상관없이 매일 같은 시간에 신문을 배달해야 했습니다. 그중 다수는 청소년이나 대학생이었고, 일부는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기도 했습니다. 이 직업은 단순히 신문을 나르는 일을 넘어, 사회 전체의 ‘정보 순환’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유통망이었습니다. 또한 지국과 독자 간의 소통, 배달원과 구독자 간의 친밀한 관계는 지역 공동체의 감정을 형성하는 데에도 일조했습니다. 설 명절이면 배달원에게 세뱃돈이나 선물을 주는 풍습도 있었고, 단골 배달원이 바뀌면 아쉬워하는 독자도 있을 만큼 배달원은 단골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 뉴스의 보급과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인해 종이신문 구독률은 급감했고, 자연스럽게 신문 배달 인력의 수요도 줄어들었습니다. 주요 언론사들은 신문 발행 부수를 축소하고, 과거 지역마다 존재했던 신문지국들도 하나둘씩 폐쇄되었습니다. 현재는 일부 고령층 독자를 대상으로 제한된 수량의 신문만이 배달되며, 이마저도 배송 회사가 맡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전통적인 ‘신문지국 배달원’은 거의 사라진 상황입니다. 이 직업은 정보 전달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동시에 매일 아침 한 도시의 하루를 여는 조용한 주인공이었습니다.
사진관 필름 현상사 – 셔터 뒤편의 기술자
디지털 카메라와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전,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반드시 사진관에서 ‘현상’과 ‘인화’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맡았던 이가 바로 ‘필름 현상사’입니다. 이들은 어두운 암실에서 필름을 조심스럽게 꺼내 화학약품에 담그고, 정확한 시간과 온도를 맞춰 현상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또한 네거티브 필름에서 사진을 확대해 인화하는 작업까지 전 과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해야 했으며, 이는 단순한 기술이 아닌 예술적 감각과 정확성을 요구하는 전문 직업이었습니다. 현상사는 각 필름의 특성을 파악하고, 노출 과다나 부족을 보정하며 최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특히 인물 사진이나 가족사진의 경우, 고객의 만족도가 직접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작업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습니다. 일부 고급 사진관에서는 필름 현상사가 ‘장인’처럼 여겨졌고, 수십 년간 한 자리를 지키며 지역 내에서 신뢰를 쌓아온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중후반 디지털카메라의 보급과 스마트폰 카메라의 급속한 발전은 필름 시장을 급속히 축소시켰습니다. 고객은 직접 사진을 찍고, 인화 없이도 디지털 기기에서 바로 확인하고 공유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필름 현상사의 역할을 불필요하게 만들었습니다. 현재는 일부 레트로 감성을 추구하는 소규모 사진관에서 필름 현상 업무를 유지하고 있으나, 전국적으로는 그 수가 매우 적고, 관련 기술을 제대로 전수받은 인력 또한 고령화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직업은 단지 사진을 인화하는 것을 넘어, 한 사람의 추억을 실체화하는 ‘기억의 기술자’였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는 직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90년대 이후 사라진 직업들은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한 시대의 생활 방식과 문화, 기술의 한계를 전제로 한 노동의 산물이었고, 지금의 디지털 시대와 비교해 볼 때 인간 중심의 감성과 접촉이 있었던 직업들입니다. 비디오 대여점 직원, 신문지국 배달원, 필름 현상사는 모두 단순한 업무자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며 사회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 가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직업들을 통해 과거를 되짚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어떤 가치를 지켜야 할지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